1991년. 해태 타이거즈 VS 빙그레 이글스. 한국 시리즈 3차전.
경기를 보던 모든 이들이 숨죽이며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8회 투아웃.
이제 1.1이닝만 막아낸다면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퍼펙트 경기가 달성된다.(그것도 한국 시리즈에서!!)
하지만 아주 평범한 뜬 공을 야수가 놓치면서(내 기억으론 중견수 뜬 공을 놓쳤던 것 같은데.. 1루쪽 파울 플라이였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확인하지 못했다.) 퍼펙트 게임이 실패하고.. 당시 막강 타선의 해태로 분위기가 넘어가면서
결국 빙그레 이글스는 패배했다.
당시 마운드 위에 있던 투수 송진우.
아직 퍼펙트 경기가 나오지 않은 한국 프로야구. 그 역사에 남을 전설의 경기였다.

한화 이글스, 등번호 21번, 투수 송진우
통산 210승, 3003이닝, 2048개의 탈삼진.. 불멸의 기록을 남기고 오늘 그가 은퇴를 발표했다.
등번호 21번, 그리고 21년간의 프로야구 선수 생활.
야구팬으로서 그에게 영광과 존경을 바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문대로 엘지트윈스는 콩가루 집안이란걸 확인했다는 점.
만 19살 어린 투수가 핀치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고참이란 선수들 누구도 나서서 안정시켜주려고 조차 않는다.
1점차 뒤진 8회 원아웃 상황에서 만 19살 어린 포수를 대신해 나온 베테랑 선수는 쓰리볼 이후 들어오는 한가운데 공을 안치고 다음 볼을 골라 볼넷으로 출루. 대타로 바뀌어 덕아웃으로 들어온다. 나름 장타력이 있는 선수를 이 상황에서 감독이 올렸을 때는 한방 때리라는 의미일텐데 .. 이 장면 보면서 어처구니가...
현재 엘지의 베테랑 선수들.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야구 못한다. 경기력 문제가 아니라 분명히 프로선수로서의 의식이란 것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그런 선수들을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믿고 응원하는 팬들이 참 처량하다고 느낀 경기. 하긴 프로 7년차 선수가 아직도 유망주 소릴 듣고 있으니..

엘지의 리빌딩은 과감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불펜진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The Pen'이 6화로 종료되었다.
영어울렁증환자가 자막도 없이..그것도 다큐멘터리를 보면서도 꽤 즐겁게 보았다. 메이저리그 구장 풍경, 락커룸 풍경등 볼거리도 충분했고 (그 많은 코멘트들을 이해하면서 보았다면 물론 더 좋았겠지만 야구팬이라면) 사실 말은 못알아듣더라도 대충 무슨 상황인가는 파악이 되기 때문에 재미있게 볼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인상깊었던 장면]
1. 햅과 박찬호 - 스프링캠프서 선발 경쟁을 벌이던 두 선수의 명암이 엇갈리던 부분. 필리스 GM이 생각보다 훨 젊었다.
2. 버락 오바마 - 올스타게임 시구.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팬임을 입증하듯 시삭스 재킷을 입고 시구. 락커룸에서 선수들과 함께 (팬으로서의) 진정성이 보이던 모습들. 중계석에서 캐스터, 해설자와 함께 중계하던 모습.
3. 찰리 매뉴얼 - 필라델피아 필리스 감독. 만 65세의 노감독이 올스타 게임 감독 소개시 90kg의 몸으로 진지하게 운동장으로 뛰어나오던 모습.
4. 불펜 호출 - 덕아웃과 연결된 직통 전화로 릴리프 호출시 불펜코치가 올려보낼 선수를 별명으로 부르던 모습. 박찬호는 '챈'
5. 박리혜 - 재일교포라 들었는데 박찬호보다도 좋게들리던 발음. 항상 그렇게 먹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고급 식당서 먹는듯한 갖가지 요리들을 먹으며 'All Mine~'을 외치던 Chan. I ENVY YOU!!!!!!!!!!!

클리블랜드 에이스 클리프리까지 가세한 필리스. 꼭 월드시리즈 진출해서 박찬호 선수도 챔피언 반지를 보유하게 되길 빌어본다.

불펜의 유래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the pen에도 언급이 된다. 그 중 한 장면.
담배회사인 불 더햄(Bull Durham)의 광고판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는데..(그림에서는 스테이크 식당...) 
'야구란 무엇인가'의 저자 레너드 코페트에 따르면 왜 불펜이란 명칭이 붙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그 어느 것도 신빙성은 별로 없다고 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어원이야 어찌됐건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데는 일리가 있다고 한다. 거기가 기자실을 제외하곤 야구장안에서 가장 '허풍떨기(bull)'가 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2009 한국 프로야구 올스타전 팬투표 결과가 나왔다.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전시되어있는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올스타전 기념구.
삼미 수퍼스타즈의 팀엠블럼이 보인다.

                          
     하리모토 이사오 (한국명 장훈
     1940년 6월 19일, 일본 히로시마현 출신. 나미와상고에서 59년에 도에이 플라이어즈 입단. 1년차부터 주전자리를 꿰차면서 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2년차인 60년 시즌 처음 타율 3할을 기록, 3년차시즌에 처음 리그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67년부터 4년 연속 수위타자에 오른것을 포함 통산 7번 리그 수위타자에 올랐다. 팀 해체와 인수 속에서 팀을 지키다 결국 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한다. 80년 시즌 롯데 유니폼을 입고 전인미답의 통산 3000안타를 달성했다. 81년 현역은퇴. 23년간의 통산성적은 2752시합 출장, 타율 .319, 안타 3085개, 홈런 504개, 타점 1676점. 90년에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에 헌액되었다.  현재 야구평론가로서 활동 중.

SEGA에서 운영 중인 '프로야구팀을 만들자! online2'(팀육성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부분 유료정책으로 운영되고 있다. http://www.yakyutsuku-online.com) 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야구인들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올리는데 이번달은 장훈의 인터뷰이다.
다음은 발췌내용.(물론 발번역)

SEGA(이하 S로 표기) : 장훈씨는 나미와 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하셨습니다.

장훈(이하 장으로 표기):  10구단정도로 부터 제의를 받았었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구단이 도에이하고 주니치였습니다. 형님은 주니치쪽으로 기울었었죠. 스카웃하시던 분이 훌륭하신 분이셔서 ' 이 구단이라면 동생을 맡길수 있겠다' 라고 생각하셨더랬죠. 실제로 계약금도 주니치가 세배 정도 더 높았었고. 그걸 알았으면 나도 주니치에 들어갔을텐데(웃음). 거기다 당시에 나는 센트럴 리그하고 퍼시픽 리그하고 그렇게 인기 차이가 있는줄도 몰랐었구요. 하지만 어린맘에 '도꾜에 가고싶다'라는 동경이 있었습니다. 또 당시의 이와모토 감독이 같은 히로시마 출신이기도 했고 같은 나미와 상고출신의 야마모토 선배도 있었고. 결국엔 내가 도에이를 선택했습니다. 

S : 고졸로서 갑자기 프로행을 결행하신 자신감은 무엇이었나요?

: 걱정했었던 부분이 힘하고 스피드쪽이었는데, 기술적인 부분은 프로에서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었죠. 58 년 가을에 구단의 추계연습에 불려가서 거기서 10일을 연습했는데 내가 체력만은 괜찮구나 해서 그렇다면 할 수 있겠다라는 희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도에이 타격코치셨던 마쯔모토씨로부터 춘계캠프에서 기술을 여러가지 배우면서 개막전 즈음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붙어있는 상태였습니다.
 
S : 역시 급이 틀리시네요.
 
: 그래도 설마, 개막전부터 나설 수 있으리라곤. 6번 좌익수로 출장했는데 삼구 삼진, 수비서도 바람방향을 잘못 읽어서 만세부르고 (웃음). 그래서 '내일부터는 2군인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도 출장하   라고 하는거에요. 거기서 용기를 냈고 덕분에 결과도 나온거죠.  

S : 도에이라고 하면 '코마자와(도쿄의 지역명)의 난폭자들'이라는..

: 모두 그렇게 말하지만 선수들이 난폭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모두 젊었었기때문에 짖궃은 장난도 치고 그랬지만요. (웃음) 그것보다는 만년 하위팀이지만 상위팀에 강한 면이 있었기때문에 붙여진것이죠. 그런 팀에 자이언츠에서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주)1925, 26, 27 연속 자이언츠를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이 부임했습니다. 설마?! 하고 모두가 생각했었죠.  

S : 61년에는 아깝게도 리그 2위. 하지만 다음해에는 일본 시리즈 우승을 했습니다.

: 그 당시는 제가 스무살 무렵이었기 때문에 생각하는 야구를 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고 사인대로 무모하게 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그러는 동안 점점 감독님의 지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가게 됐습니다. 그때의 도에이는 한 방도 있었고 20승 투수도 나왔었죠. 초반에 3점정도는 보통 리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여유인거에요. 우리가 곧 실수를 할거란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도에이는 만년 5위팀. 집중하면 강하지만 무너지면 위험한, 그런 팀이었습니다.

S : 그걸 미즈하라 감독이 바꿔놓았던 거군요.

: 일본시리즈 우승을 하고 미즈하라 감독은 ' 앞으로 10년이 중요하다'고 항상 말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구단의 이해가 없었었죠. 구상한 보강도 이뤄지지 않았고 영화 업계(도에이는 일본 전후 최대 영화사)도 점점 불황이 되어 결국은 미즈하라 감독도 떠났죠. 

S
: 그리고 팀은 닛타쿠, 일본 햄으로 팔렸습니다.

:  새로운 구단이 되면 물갈이가 되는건 당연한 거죠. 74년을 마지막으로  오오스기, 오오시타, 백인천이 이적하고 남은것은 저였습니다. 역시 기분은 엉망이었죠. 그래서 75년 시즌 오프 때 '필요없다면 내보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더니 사장이었던 미하라씨가 '원하는 구단에 보내주겠다'고. 남자다웠던 분이셨죠. FA같은거도 없던 시대에 그렇게 얘기해주셨죠. 

S : 그래서 자이언츠로.....

: 그게 사실은 난 한신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당시 한신감독 요시다씨가 불러주셨었죠. 기뻤죠. 그래서 완전히 오사카에 갈 작정으로 준비도 해두었습니다. 살 집도 준비해놓았으니. 

S : 그런 사연이 있었습니까?

: 그것이 돌연 어떤 분을 통해서 자이언츠에 오지않겠나 하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주 놀랐습니다. 강함에의 동경도 있었고 저도 자이언츠의 팬이었기때문에. 거기다 이미 자이언츠 입단이 확정된듯 얘기를 하기때문에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하고선 급하게 요시다감독에게 연락을 했죠. 그랬더니 요시다 감독은 싫은말 한마디 없이 ' 하리, 좋은 이야기 아니냐. 같은 도꾜기도 하고, 자이언츠로 가거라'라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S : 그런 일이 있었다는것은....

: 지금까지도 요시다씨와 그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 그 당시에 하리가 한신으로 왔으면 재밌었을 텐데'라며 (웃음)

S :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다는 거군요. 그리고 자이언츠, 롯데에서 플레이 하시고 3085안타라는 금자탑을 세우셨습니다.

: 저 스스로도 잘 때려냈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게 매년 안타가 나오기전까지는 불안했었습니다. 그 원동력은 역시 헝그리 정신이었을까나. 또 하나 항상 생각했던것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었습니다. 4안타를 쳤어도 그건 오늘 상대 투수의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일 뿐 안타를 치는게 당연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일도 똑같이 안타를 칠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않고 해나갔기 때문에 계속 해서 안타를 칠 수 있었던 거죠.

S : 그럼 '프로야구팀을 만들자!'에서 부활한 장훈 선수가 대전하고 싶은 현역 선수를 꼽으신다면?

: 역시 다르빗슈(닛뽄햄), 이와쿠마(라쿠텐), 와쿠이(세이부), 키시 다카유키(세이부). 그들과는 대전해보고 싶기도 하고 내 팀에도 넣고 싶네요 (웃음). 그리고 역시 좋은 포수가 있다면 우승을 노려볼 만한 팀이 될 수 있겠죠. 지금이라면 사토 자키(롯데 포수), 호소카와( 세이부 포수), 그리고 성장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하고 있는 히로시마의 이시하라겠죠.

S : 그럼 그 배터리들과 장훈선수는 어떤 대결을 펼칠까요?

: 프로로서 저는 역시 중거리 타자입니다. 광각타법이라고 불렸습니다만 실제 좌우 골고루 때려냈었습니다. 투수가 여러군데로 던졌으니까요. 거기에 거스르지  않고 결대로 친 결과입니다. 따라서 위의 선수들이 상대라도 힘껏 잡아당겨치는 것보다 코스에 맞춰서 확실히 맞춰보고 싶네요. 현역시절엔 다리에도 자신이 있어서 2루타, 3루타를 많이 쳤었죠.

** 인터뷰 내용 중 굵은 글씨의 말은 LG트윈스 선수들과 프런트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ㅠㅠ


   NPB(일본프로야구) 2009 올스타 명단 발표(7/6)
프로야구 마쯔다 올스타게임 운영위원회는 6일, 올스타 전에 출장할 감독 추천선수들을 발표, 팬 투표와 선수간 투표에 의해 선출된 멤버를 포함한 퍼시픽, 센트럴 양 리그 각 28명의 진용이 결정되었다. -교도 통신


   센트럴 리그의 경우 야쿠르트의 임창용 선수가 팬투표에 의해 올스타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큰 뉴스가 되었었다. 이번 팬 투표에 의한 선수 명단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점은 요미우리 자이언츠나 한신 타이거즈의 선수들이 아니라 히로시마 카프의 선수들이 5명이나 선출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프로야구 판에서 가장 팬들의 충성도가 높고 전국적인 인기도에서도 이제 요미우리를 앞섰다고 평가받던 한신 타이거즈는 올스타 명단에 단 한명, 그것도 감독추천으로 마무리 후지카와 큐지가 이름을 올렸을 뿐이다. 하지만 히로시마 카프도 한신 타이거즈에 뒤떨어지지 않는 팬들의 충성도를 자랑하는 구단이다.
(이젠 새로운 구장으로 이전했지만) 원폭 돔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히로시마 시민구장은 히로시마의 원폭 돔과 함께 히로시마의 상징이기도 했다. - 시민구장 보기 -

   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일본내 다른 구단과는 틀리게 시민구단으로서 출발하였다.( 경영은 마쯔다 가문의 족벌운영이지만 마쯔다 그룹의 경영과는 분리되어있다고 한다.) 팀명인 Carp는 잉어의 영어명으로서 히로시마 시를 가로지르는 오오타가와(일급수다!)가 잉어의 산지로 유명했고 히로시마 성(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의 별칭인 鯉城(리죠우-잉어성)에서 착안되었다고 한다. 잉어는 용이되어 승천하는 출세어로서 당시 원폭피해로 피폐한 히로시마에서 탄생한 만큼 히로시마의 부흥을 바라는 소망이 들어가있는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 日本語Wikipedia

   1984 시즌에 올린 75승이 팀 시즌 최다승으로 센트럴리그 팀 중 유일한 최다승이 80승미만인 구단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강팀은 아니었지만(퍼펙트 게임 3회, 노히트 노런 9회를 당해 일본프로야구 최다기록) 1979년과 1980년 일본시리즈 2연패를 하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있는 재일동포 야구선수 중 가네모토 선수도 히로시마 카프 출신. 현재의 감독은 구단 사상 두번째 외국인 감독으로 마틴 브라운이 2006년부터 지휘봉을 잡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프로야구에서도 많이 활용되고 있는 선수별 응원가를 최초로 만든것도 히로시마 카프의 팬들이었다. ( 히로시마 카프의 전설인 야마모토 코지를 응원하기 위해 만든 응원가 ) 관중 모두가 참여하는 새로운 응원문화를 만들어냈던 히로시마 카프의 팬들. 팀의 성적과는 상관없이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팬을 가진 히로시마 카프는 일본 프로야구의 명문팀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08년, 제주 해녀박물관.
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낳지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