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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eball,야구,野球

장훈, 하리모토 이사오

                          
     하리모토 이사오 (한국명 장훈
     1940년 6월 19일, 일본 히로시마현 출신. 나미와상고에서 59년에 도에이 플라이어즈 입단. 1년차부터 주전자리를 꿰차면서 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2년차인 60년 시즌 처음 타율 3할을 기록, 3년차시즌에 처음 리그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67년부터 4년 연속 수위타자에 오른것을 포함 통산 7번 리그 수위타자에 올랐다. 팀 해체와 인수 속에서 팀을 지키다 결국 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한다. 80년 시즌 롯데 유니폼을 입고 전인미답의 통산 3000안타를 달성했다. 81년 현역은퇴. 23년간의 통산성적은 2752시합 출장, 타율 .319, 안타 3085개, 홈런 504개, 타점 1676점. 90년에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에 헌액되었다.  현재 야구평론가로서 활동 중.

SEGA에서 운영 중인 '프로야구팀을 만들자! online2'(팀육성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부분 유료정책으로 운영되고 있다. http://www.yakyutsuku-online.com) 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야구인들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올리는데 이번달은 장훈의 인터뷰이다.
다음은 발췌내용.(물론 발번역)

SEGA(이하 S로 표기) : 장훈씨는 나미와 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하셨습니다.

장훈(이하 장으로 표기):  10구단정도로 부터 제의를 받았었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구단이 도에이하고 주니치였습니다. 형님은 주니치쪽으로 기울었었죠. 스카웃하시던 분이 훌륭하신 분이셔서 ' 이 구단이라면 동생을 맡길수 있겠다' 라고 생각하셨더랬죠. 실제로 계약금도 주니치가 세배 정도 더 높았었고. 그걸 알았으면 나도 주니치에 들어갔을텐데(웃음). 거기다 당시에 나는 센트럴 리그하고 퍼시픽 리그하고 그렇게 인기 차이가 있는줄도 몰랐었구요. 하지만 어린맘에 '도꾜에 가고싶다'라는 동경이 있었습니다. 또 당시의 이와모토 감독이 같은 히로시마 출신이기도 했고 같은 나미와 상고출신의 야마모토 선배도 있었고. 결국엔 내가 도에이를 선택했습니다. 

S : 고졸로서 갑자기 프로행을 결행하신 자신감은 무엇이었나요?

: 걱정했었던 부분이 힘하고 스피드쪽이었는데, 기술적인 부분은 프로에서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었죠. 58 년 가을에 구단의 추계연습에 불려가서 거기서 10일을 연습했는데 내가 체력만은 괜찮구나 해서 그렇다면 할 수 있겠다라는 희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도에이 타격코치셨던 마쯔모토씨로부터 춘계캠프에서 기술을 여러가지 배우면서 개막전 즈음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붙어있는 상태였습니다.
 
S : 역시 급이 틀리시네요.
 
: 그래도 설마, 개막전부터 나설 수 있으리라곤. 6번 좌익수로 출장했는데 삼구 삼진, 수비서도 바람방향을 잘못 읽어서 만세부르고 (웃음). 그래서 '내일부터는 2군인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도 출장하   라고 하는거에요. 거기서 용기를 냈고 덕분에 결과도 나온거죠.  

S : 도에이라고 하면 '코마자와(도쿄의 지역명)의 난폭자들'이라는..

: 모두 그렇게 말하지만 선수들이 난폭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모두 젊었었기때문에 짖궃은 장난도 치고 그랬지만요. (웃음) 그것보다는 만년 하위팀이지만 상위팀에 강한 면이 있었기때문에 붙여진것이죠. 그런 팀에 자이언츠에서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주)1925, 26, 27 연속 자이언츠를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이 부임했습니다. 설마?! 하고 모두가 생각했었죠.  

S : 61년에는 아깝게도 리그 2위. 하지만 다음해에는 일본 시리즈 우승을 했습니다.

: 그 당시는 제가 스무살 무렵이었기 때문에 생각하는 야구를 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고 사인대로 무모하게 할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그러는 동안 점점 감독님의 지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가게 됐습니다. 그때의 도에이는 한 방도 있었고 20승 투수도 나왔었죠. 초반에 3점정도는 보통 리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여유인거에요. 우리가 곧 실수를 할거란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도에이는 만년 5위팀. 집중하면 강하지만 무너지면 위험한, 그런 팀이었습니다.

S : 그걸 미즈하라 감독이 바꿔놓았던 거군요.

: 일본시리즈 우승을 하고 미즈하라 감독은 ' 앞으로 10년이 중요하다'고 항상 말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구단의 이해가 없었었죠. 구상한 보강도 이뤄지지 않았고 영화 업계(도에이는 일본 전후 최대 영화사)도 점점 불황이 되어 결국은 미즈하라 감독도 떠났죠. 

S
: 그리고 팀은 닛타쿠, 일본 햄으로 팔렸습니다.

:  새로운 구단이 되면 물갈이가 되는건 당연한 거죠. 74년을 마지막으로  오오스기, 오오시타, 백인천이 이적하고 남은것은 저였습니다. 역시 기분은 엉망이었죠. 그래서 75년 시즌 오프 때 '필요없다면 내보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더니 사장이었던 미하라씨가 '원하는 구단에 보내주겠다'고. 남자다웠던 분이셨죠. FA같은거도 없던 시대에 그렇게 얘기해주셨죠. 

S : 그래서 자이언츠로.....

: 그게 사실은 난 한신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당시 한신감독 요시다씨가 불러주셨었죠. 기뻤죠. 그래서 완전히 오사카에 갈 작정으로 준비도 해두었습니다. 살 집도 준비해놓았으니. 

S : 그런 사연이 있었습니까?

: 그것이 돌연 어떤 분을 통해서 자이언츠에 오지않겠나 하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주 놀랐습니다. 강함에의 동경도 있었고 저도 자이언츠의 팬이었기때문에. 거기다 이미 자이언츠 입단이 확정된듯 얘기를 하기때문에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하고선 급하게 요시다감독에게 연락을 했죠. 그랬더니 요시다 감독은 싫은말 한마디 없이 ' 하리, 좋은 이야기 아니냐. 같은 도꾜기도 하고, 자이언츠로 가거라'라고.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S : 그런 일이 있었다는것은....

: 지금까지도 요시다씨와 그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 그 당시에 하리가 한신으로 왔으면 재밌었을 텐데'라며 (웃음)

S :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다는 거군요. 그리고 자이언츠, 롯데에서 플레이 하시고 3085안타라는 금자탑을 세우셨습니다.

: 저 스스로도 잘 때려냈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게 매년 안타가 나오기전까지는 불안했었습니다. 그 원동력은 역시 헝그리 정신이었을까나. 또 하나 항상 생각했던것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었습니다. 4안타를 쳤어도 그건 오늘 상대 투수의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일 뿐 안타를 치는게 당연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일도 똑같이 안타를 칠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않고 해나갔기 때문에 계속 해서 안타를 칠 수 있었던 거죠.

S : 그럼 '프로야구팀을 만들자!'에서 부활한 장훈 선수가 대전하고 싶은 현역 선수를 꼽으신다면?

: 역시 다르빗슈(닛뽄햄), 이와쿠마(라쿠텐), 와쿠이(세이부), 키시 다카유키(세이부). 그들과는 대전해보고 싶기도 하고 내 팀에도 넣고 싶네요 (웃음). 그리고 역시 좋은 포수가 있다면 우승을 노려볼 만한 팀이 될 수 있겠죠. 지금이라면 사토 자키(롯데 포수), 호소카와( 세이부 포수), 그리고 성장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하고 있는 히로시마의 이시하라겠죠.

S : 그럼 그 배터리들과 장훈선수는 어떤 대결을 펼칠까요?

: 프로로서 저는 역시 중거리 타자입니다. 광각타법이라고 불렸습니다만 실제 좌우 골고루 때려냈었습니다. 투수가 여러군데로 던졌으니까요. 거기에 거스르지  않고 결대로 친 결과입니다. 따라서 위의 선수들이 상대라도 힘껏 잡아당겨치는 것보다 코스에 맞춰서 확실히 맞춰보고 싶네요. 현역시절엔 다리에도 자신이 있어서 2루타, 3루타를 많이 쳤었죠.

** 인터뷰 내용 중 굵은 글씨의 말은 LG트윈스 선수들과 프런트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ㅠㅠ